공서적 합일과는 대조적으로 성숙한 '사랑'은 '자신과의 통합성', 곧 개성을 유지하는 상태에서의 합일'이다. 사랑은 인간에게 능동적인 힘이다. 곧 인간을 동료에게서 분리하는 벽을 허물어버리는 힘, 인간을 타인과 결합하는 힘이다. 사랑은 인간으로 하여금 고립감과 분리감을 극복하게 하면서도 각자에게 각자의 특성을 허용하고 자신의 통합성을 유지시킨다. 사랑에서는 두 존재가 하나로 되면서도 둘로 남아있다는 역설이 성립힌다.
그러나 활동에 대한 또 하나의 개념은 외부적 변화가 일어났든, 일어나지 않았든 인간의 타고난 힘을 사용하는 것을 가리킨다. 스피노자는 활동에 대한 후자의 개념을 가장 명백하게 정식화했다. 그는 감정을 능동적 감정과 수동적 감정, 곧 '행동'과 '격정'으로 구별한다. 능동적 감정을 나타낼 때 인간은 자유롭고 자기 감정의 주인이 된다. 그러나 수동적 감정을 나타낼 때 인간은 쫓기고 자기 자신은 알지도 못하는 동기에 의해 움직여지는 대상이 된다. 그러나 수동적인 감정을 나타낼 때 인간은 쫓기고 자기 자신은 알지도 못하는 동기에 의해 움직여지는 대상이 된다. 이렇게 해서 스피노자는 덕과 힘이 동일하다는 명제에 도달한다. 선망, 질투, 야망, 온갖 종류의 탐욕은 격정이다. 그러나 사랑은 행동이며 인간의 힘을 행사하는 것이고, 이 힘은 자유로운 상황에서만 행사할 수 있을 뿐, 강제된 결과로서는 결코 나타날 수 없다.
사랑은 수동적 감정이 아니라 활동이다. 사랑은 '참여하는 것'이지 '빠지는 것'이 아니다. 가장 일반적인 방식으로 사랑의 능동적 성격을 말한다면, 사랑은 본래 '주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할 수 있다.
준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단순한 듯 하지만 사실은 매우 애매하고 복잡하다. 가장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오해는 준다는 것을 무언가를 '포기하는 것', 빼앗기는 것, 희생하는 것이라는 오해이다. 성격상 받아들이고 착취하고 혹은 저장하는 것을 지향하는 단계를 넘어서지 못한 사람은 '준다'고 하는 행위를 이러한 방식으로 경험한다. 시장형 성격의 사람은 주려고 하지만 단지 받는 것과 교환할 뿐이다. 그에게는 받는 것 없이 주기만 하는 것은 사기당하는 것이다.
성격이 비생산적인 사람들은 주는 것을 가난해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들 대부분은 주려고 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희생이라는 의미ㅇ서 주는 것을 덕으로 삼는다. 그들은 주는 것이 고통스럽다는 이유 때문에 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덕은 희생을 감수한다는 행위에서만 성립된다. 그들의 경우, 받는 것 보다는 주는 것이 낫다는 규범은 환희를 경험하기보다는 박탈당하는 것을 감수하는 편이 낫다는 의미이다.
생산적인 성격의 경우, 주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주는 것은 잠재적 능력의 최고 표현이다. 준다고 하는 행위 자체에서 나는 나의 힘, 나의 부, 나의 능력을 경험한다. 고양된 생명력과 잠재력을 경험하고 나는 매우 큰 환희를 느낀다. 나는 나 자신을 넘쳐흐르고 소비하고 생동하는 자로서, 따라서 즐거운 자로서 경험한다. 주는 것은 박탈당하는 것이 아니며 준다고 하는 행위에는 나의 활동성이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주는 것은 받는 것보다 더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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